2015년 7월 21일 화요일

책 만드는 마을을 떠나며[IVP BOOK NEWS 120호]


[IVP 이야기]
책 만드는 마을을 떠나며



나뭇잎 마을

나루토라는 일본 만화가 있습니다. 1999년 연재를 시작해 2014년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북미와 유럽에서는 ‘나루토 신드롬’이라 부를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엄청나게 장대한 이야기이지만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루토와 친구들이 사는 나뭇잎 마을(마을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소국에 가깝습니다)의 닌자들이 세계 도처에서 출몰하는 악의 세력에 맞서 마을을 지켜내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한두 명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힘으로 모든 이야기를 주도하는 일반적인 작품들과 달리 나루토에서 마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을 구성원들 각자에게는 주어진 역할이 있고 그들은 이를 충실히 수행합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임무가 없습니다. 마을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 거대 악을 물리친다는 이야기는 나루토의 핵심입니다. 나루토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나보다는 내 옆, 내 친구,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그 힘이 마을을 위기로부터 구해 내고 세계 전체를 평화로 나아가게 합니다.

얼핏 여느 일본 소년 만화의 맥락을 그대로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루토 이야기 안에 담긴 의미는 자못 진지합니다. 악한 힘을 물리치기 위해 닌자라는 힘을 키우지만, 되려 증오와 미움이 커집니다. 평화를 이루는 길은 결코 단순하거나 쉽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마을은 다시 한 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갈등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마을 구성원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것 한 가지는 개인이 홀로 평화를 이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옆에 ‘너’가 있어야, ‘친구’와 ‘동료’가 있어야, 그리고 ‘마을’이 있어야 그 길을 걸어갈 힘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책 만드는 마을

글을 쓰는 것은 개인의 일입니다. 물론 여럿이서도 글을 쓸 수 있지만, 그 글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몫입니다. 좋은 글은 독자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세계 곳곳에 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책을 만드는 일은 개인의 몫을 넘어섭니다. 좋은 글감을 찾고, 글 쓰는 이를 발견하고, 누구나 읽을 수 있게끔 다듬고 편집하며, 표지를 디자인하고, 대량으로 제작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완성된 책이 적절하게 유통되기 위해 망을 구축하고 공급합니다. 이 모든 일이 유기적으로 작동해야 글은 비로소 책이 됩니다. 다시 말해 글이 개인의 역할이라면 책은 공동체의 몫인 셈입니다. 우리는 그런 공동체를 가리켜 ‘출판사’라고 합니다.

출판사는 책을 만드는 마을과 같습니다. 번잡한 도시보다는 한적한 농촌 마을 같지요. 그래서 겉으로 보면 조용하고 느긋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책을 만들고 있으니 왠지 고상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을 안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얼마나 치열한지 모릅니다. 원고에 담긴 문장 속 단어를 하나 하나 쪼개며 그것이 적절한지, 맥락에 부합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세심히 살핍니다. 적절한 표지를 찾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시안을 교체합니다. 최적의 판매를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자리에 앉을 시간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마을이 그렇듯 갈등도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책을 만들기 위해 치열한 토론도 벌이고 거의 완성된 책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도 합니다. 지난하기도 하고 효율도 떨어지는 일임에도, 우리 마을이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좋은 책은 누군가에게 울림을 주고 그 울림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란 확신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책 만드는 마을의 모든 구성원은 알고 있습니다. 좋은 책은 결코 혼자 만들 수 없다는 것을요.


우리 모두의 바람

저는 1년 반 동안 이 마을의 한 모퉁이를 담당했습니다. 출판사라는 마을에 완전히 녹아들기에는 조금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는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했습니다. 책 한 권이 독자들의 손에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고가 있어야 하는지,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만들고 전하는 일은 마치 부모 마음과 같아서 언제나 아쉽고 한편으로 걱정되며, 또 은근한 기대를 합니다. 때론 실망하고 또는 의외의 결과에 놀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우리가 만든 책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책을 통해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의 바깥을 상상하고, 어렴풋한 길을 걸어갈 용기가 되고, 낯선 곳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출판사 마을 구성원 모두의 바람입니다.

 저는 이 바람을 안고 마을을 떠납니다. 제가 없어도 우리 마을은 언제까지나 좋은 책을 만들 것이라 믿습니다. 또한 저는 앞으로도 제가 잠시 살았던 이 마을을 응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좋은 사람들이 정말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또 앞으로도 그리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경험을 나눠 준 IVP 구성원 모두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김형욱|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2014년 3월에 IVP에 입사하여 ‘산책’ 매장 관리와 도서 회원 및 “시냇가에 심은 나무” 독자 관리를 맡아 일했다. 새로운 공부를 위해 8월 유학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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