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가슴에는 한이 맺혀 있다. 이는 외세의 잦은 침략과 압제로 짓밟히고 처절한 가난에 찌든 오랜 비운의 역사가 만들어낸 한국인의 특이한 심성이다. 그동안의 경제 중흥은 가난을 면하고 한번 잘 살아보려는 한풀이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사회가 경제 성장 제일주의로 치달음으로써 기성세대 안에 가난으로 사무친 한을 풀어 주었다면, 젊은 세대는 성장주의로 인한 후유증을 고스란히 떠안았으며, 따라서 더 깊고 고통스러운 한이 맺혔다.
성장주의 부작용이 빚어낸 사건들이 그들 안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지금 그것이 한이 되어 슬피 울고 있다. 이들의 상처를 싸매 주며 그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 이는 경제 성장이 아니라 긍휼과 정직과 배려, 즉 인간다움이 이 사회에 회복됨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기성세대 정치인과 종교인들에게 결여되어 있다.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나
세월호 사건 1주기 이래로 이를 ‘잊지 말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사회의 무정함과 인간다움의 상실을 그대로 방증하는 바이다. 금수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으랴. 우리 아이들이 눈앞에서 산 채로 수장되는 길고도 긴 시간을, 숨 막히고 간장이 녹는 아픔과 좌절과 분노로 자지러졌던 그 참극을! 이 사건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철필로 새겨지고 우리 민족사에 가장 참혹하고 충격적이며 치욕과 의혹으로 얼룩진 비극으로 기록될 것이다.
아무리 불편한 진실에 눈 감고 망각의 늪 속에 그것을 묻어버리려 해도 곧 드러날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세월호 사건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이 사회의 총체적인 부패와 부실함이 드러난 사건이었음을 잊지 말자. 국가 개조 차원의 변혁이 필요하다는 대통령의 공약이 위기 모면을 위한 임기응변이었는지, 어떤 실효가 있었는지 진단해야함을 잊지 말자. 이처럼 큰 희생을 치르고도 진정한 자성과 변화가 없다면 이 민족은 희망이 없다.
또한 교회가 이 민족적 비극 앞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곧 역사가 심판할 것임을 잊지 말자. 교회가 고통 받는 이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주며 선견자적인 안목으로 이 민족의 갈 길을 제시했는지, 자신의 명예와 무사안일만을 추구하는 태도로 권력에 빌붙어 짖지 못하는 개가 되었는지는 머지않아 역사가 판명해 줄 것이다.
인생은 아프다
미국 칼빈 신학교 교장이었던 존 크로밍가 교수는 평생 정신분열증에 걸린 아들을 곁에 두고 살며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도 평생 극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아내를 돌보며 미칠 듯 괴롭고 고독한 삶을 근근이 버텨냈다고 고백했다.
평생 하나님께 간구하며 매달려도 가시지 않는 아픔을 절절히 끌어안고 신음하며 사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도 부지기수다. 하우어워스가 말했듯이, 이런 이들에게 신앙은 해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민족은 지금 개인과 가정의 아픔뿐 아니라 무너져 가는 교회와 사회와 이 나라에 대한 염려와 아픔을 끌어안고 산다.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고뇌와 실존의 아픔을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채 모든 문제의 정답을 가진 듯 기독교 신앙을 만병통치약처럼 소개하는 천박하고 상업적인 메시지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기본적으로 인생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인물들을 향해 설교하듯이 청중의 실존과 동떨어진 메시지로 허공을 친다. 교인들이 처해 있는 실존의 깊이에 도무지 파고들지 못하는 설교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다. 제발 알 수 없는 인생의 고통에 질려 혼비백산해 있는 이들에게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할 것처럼 입빠른 정답을 툭툭 던지는 무정함과 경박함을 피해줬으면 좋겠다. 바로 나부터.
박영돈 | 현재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의학 교수로 섬기고 있으며, 한국교회 성령 운동의 문제점을 분석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과 한국교회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제시한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이상 IVP)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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