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문을 열며 신간을 소개합니다.
아펜젤러
조선에 온 첫 번째 선교사와 한국 개신교의 시작 이야기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윌리엄 그리피스 지음|이만열 옮김
2015년 6월 11일 발행
양장 148*210|360면|값 17,000원
ISBN 978-89-328-1413-1 (04230)
ISBN 978-89-328-1414-8 (세트)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윌리엄 그리피스 지음|이만열 옮김
2015년 6월 11일 발행
양장 148*210|360면|값 17,000원
ISBN 978-89-328-1413-1 (04230)
ISBN 978-89-328-1414-8 (세트)
한반도에 복음의 등불을 들고 온 개척자 아펜젤러, 그 열정의 삶을 만나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무덤의 빗장을 산산이 부수고 부활한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1885년 부활주일에 한국에 도착한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드린 기도다. 그리고 그는 이 기도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남은 생애를 바쳤다.
한국에 기독교 복음을 전한 선구자 아펜젤러가 이 민족을 위한 축복 기도를 드린 지 1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그 기도의 씨앗은 이 땅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눈부시게 자라났다. 안팎으로 불안정한 정세에 시달리던 허약한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한 제국주의 세력과 달리, 아펜젤러는 복음으로 이 나라를 새롭게 세우고자 했던 겸손하고 열정적인 ‘근대의 개척자’였다. 아펜젤러의 유일한 전기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인간 아펜젤러의 삶과 당시 한반도의 정치적‧역사적‧문화적 상황을 함께 다루어, 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처음 정신을 회복하도록 도울 것이다.
이 책이 들려주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한국 개신교의 시작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당시 한민족이 복음에 어떻게 반응하고 그것을 얼마나 갈급해하며 받아들였는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 시대의 여러 한계들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던 걸림돌들을 파악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자신을 성찰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얻게 될 것이다.
<출판사 리뷰>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아펜젤러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본 한국 기독교의 시작 이야기
한국에 기독교 복음을 전한 선구자 아펜젤러가 1885년 부활주일 제물포항에 발을 딛고 이 민족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드린 지 1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그 기도의 씨앗은 이 땅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눈부시게 자라나 크고 듬직한 나무가 되었다. 안팎으로 불안정한 정세에 시달리던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한 제국주의 세력과 달리, 아펜젤러는 복음으로 이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했던 겸손하고 열정적인 ‘근대의 개척자’로, 복음전도와 교회개척 외에도 교육사업, 성경 번역, 출판 등을 통해 한민족의 정신 속에 진정한 의미의 근대가 깨어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아펜젤러에 관한 유일한 전기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생전에 그가 남긴 말과 서신, 보고서, 일기 등을 토대로 그의 생애와 사역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아펜젤러의 극적인 회심과 부르심의 과정, 한국행, 수많은 만남, 그가 세운 한국의 첫 교회,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매력적인 성품과 깊은 인간애 등 인간 아펜젤러의 삶과 함께, 당시 한반도의 정치적‧역사적‧문화적 상황을 다루는 이 책은 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처음 정신을 회복하도록 도울 것이다.
한민족과 한국의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성경번역 모임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침몰하는 배 속에서 사망했다. 자신에게 허락된 마지막 순간까지 이웃을 위해 다 바치고 차디찬 물속에서 마감한 그의 짧지만 위대한 생애는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어떤 큰 사랑의 희생과 수고가 치러져야 했는지를 절감하게 한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선교에 새로운 열기를 불어넣고 당명한 시대적 사명을 수행해 갈 힘찬 동력을 얻을 것이다.
<지은이 소개 >
윌리엄 그리피스 William Elliot Griffis
미국인 동양학자·목회자·강연자로 왕성한 저작 활동을 했다.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서구사회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아시아, 특히 한국과 일본에 관한 지식의 형성에 그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드물다. 1843년 9월 17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특히 화란개혁교회의 분위기에서 자랐다. 1863년에 미국 남북전쟁에 참여했고 전쟁 후 1865년부터 러트거스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후 화란개혁신학교(지금의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일본 에치젠 영주의 초청을 받아 1870년부터 에치젠의 학교에서 이학과 화학 등을 가르쳤다. 1874년 미국에 돌아가 약 2년간 일본에 관한 순회강연을 했고 1876년에 유니언 신학교에 입학, 이듬해 졸업했다. 이후 줄곧 목사이자 작가로 활동한 그는 이 기간에 자신의 대표작인 「천황의 제국」(Mikado’s Empire, 1876)과「은자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1882)을 저술했다. 1884년에는 유니언 칼리지에서 신학박사학위를, 1900년에는 모교인 러트거스 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08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勳)4등 욱일장을, 1926년에 훈3등 욱일장을 받았으며, 한국에서 3·1운동이 발발한 직후 서재필이 조직한 ‘한국친우회’ 뉴욕지부의 위원으로 한국인 민족주의자들과 더불어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기도 했다. 한국과 관련하여 이 책 「아펜젤러」(A Modern Pioneer in Korea, 1912)를 비롯하여 수많은 글을 썼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주제의 여러 저술을 남겼다. 1928년 2월 5일 플로리다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 소개 >
이만열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문학박사)했고, 합동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숙명여대 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겸 이사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 외국인근로자를위한희년선교회 대표,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 기독교와 역사의식」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기독교 의료사」 「역사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역사의 중심은 나다」 등과 산문집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 등이 있다.
<추천의 말>
아펜젤러 내한 130주년을 맞은 뜻 깊은 해에 그의 전기가 다시 개정되어 출간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한국 선교 역사의 토대를 놓은 아펜젤러와 같은 인물에 관한 마땅한 전기가 여태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 책은 인간 아펜젤러의 삶과 한국 기독교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며, 국내에 아펜젤러 연구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__김영호 배재대학교 총장
언더우드는 위대한 선교사였다. 기독교 전체 역사에서도 그보다 더 위대한 선교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언더우드의 삶과 사역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데, 감사하게도 그와 27년간 삶을 나눈 호턴 부인이 직접 그의 전기를 남겨 주었다. 1990년에 한국에 처음 번역·출판된 이 전기가 이번에 새로 정밀하게 다듬어져 출판되는 것을 보게 되어 매우 기쁘다. 역사학자인 번역자는 단순히 원문을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곳곳에 역주를 달아 좀더 객관적인 사실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행여 저자가 전기 주인공의 아내로서 보일 수 있는 편향을 보완함으로써 이 책은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이 귀한 전기가 널리 읽히기를 기대하고 소망한다.한국기독교사학도로서 나는 이 책을 ‘고전의 재발견’ 내지 ‘고전 새로 읽기’로 부르고 싶다. 한국 사학계의 대학자이신 이만열 교수는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이자 ‘아름다운 죽음’으로 ‘선한 목자’의 본을 보여 준 아펜젤러의 영문판 전기를 찾아내 우리말로 번역하시고, 전기 작가 그리피스가 책에 반영하지 못했던 아펜젤러의 설교문과 회고록 등도 함께 소개하여 아펜젤러의 삶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도와주셨다. 중세 암흑기에 르네상스 운동으로 불리는 고전의 재발견이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듯이, 이 책이 위기에 처한 오늘 한국 기독교계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동기와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__이덕주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아펜젤러에 대한 이 전기를 읽으면서 나는 한국에서 파송되는 선교사들이 기억해야 할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당시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조선을 아주 면밀하게 조사하고 준비하여 선교에 참여했다. 당시 조선인의 삶을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즉 철저한 준비와 관찰 그리고 준비된 정보를 가지고 선교에 임해야 한다. 둘째, 한편으로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선교사들은 현지 문화나 역사 등 깊은 내면의 문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 책을 보면 해외에서 온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와는 매우 다른 시각과 판단을 내리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이처럼 선교사가 아무리 선교지에 대한 깊은 지식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내부자의 시각에서 볼 때는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많을 수 있다는 점은, 이제 한국에서 나가는 선교사들에게도 엄청난 선교적 겸손을 요청한다. 우리는 본서를 탁월하게 번역했을 뿐 아니라 잘못된 정보나 왜곡된 시각에 바른 주석을 달아 올바른 관점을 제공해 준 이만열 교수께 깊이 감사를 표해야 한다. 그의 세심한 노력 덕분에 이 책은 구한말의 초창기 선교 상황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설명을 담은 탁월한 책이 되었다.__한철호 선교한국파트너스 상임위원장
<차례>
개정판 역자 서문
서문
머리말
1. 하나님의 한국-찬란한 아침
2. 인간의 한국-실제 삶
3. 은자의 나라, 문이 열리다
4. 감리교와 아펜젤러
5. 그리스도의 군병 훈련
6. 한국에 대한 관심
7. 위대한 결단
8. 항해와 첫인상
9. 한국의 집
10. 묵은 땅에 뿌린 새 씨앗
11. 어린아이의 힘
12. 말을 타고-한국의 옛 도읍들
13. 북쪽에서-나루터 도시 평양
14. 재미있고 유쾌한 가정생활
15. 복음이라는 보석을 바라보며
16. 문자의 독점
17. 한국어를 익히다
18. 전염병의 시기
19. 학교와 교회
20. 첫 번째 휴가-고국에서
21. 문명의 개척자
22. 상상의 세계
23. 복음의 동역자들
24. 두 번째 고국 방문
25. 타인의 생명을 구하다
26. 추수의 계절
27. 성령의 바람
부록1_ 아펜젤러 설교문
부록2_ 회고록
연보
색인
<책 속으로>
여느 선교사들보다 깨끗한 이미지를 남긴 44년간의 짧은 생애는 안타깝게도 불의의 사고로 마감됐지만, 아펜젤러가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하고 간 사역에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부채의식을 느낀다면, 그의 짧고 깨끗한 삶이 한국교회에 새로운 선교 열기와 사명 수행의 힘찬 동력을 제공할 것이라 믿는다. ‘한국 근대의 선구자’ 아펜젤러의 삶을 조명하기 위한 개정판으로 이 책을 출간하는 것은 그가 온 지 130주년이 되는 시점인데도 이 책을 능가할 만한 아펜젤러 연구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펜젤러의 일기와 보고서와 설교 등을 당시 한국 선교의 전반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면밀히 검토하고 연구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이 땅의 감리교회와 교회사학계는 이런 요청에 부응해 아펜젤러 연구를 더욱 촉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_“개정판 역자 서문”에서
아펜젤러가 한국에 왔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들과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이 기록하려고 했던 것은 단지 경건한 찬사의 말이 아니다. 그들은 아펜젤러와 그의 동역자들이 현실을 거슬러 하나님 안에서 이룩한 업적들을 보여 주려 한 것이다. 사실 아펜젤러가 처음 한국을 찾아왔을 때, 한국은 야만적인 이교도의 나라였다. 그러나 그가 죽어 한국을 떠났을 때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희망과 가능성과 능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늘날 모습과 같은 기독교화된 조선을 위해 살고 일했다. 따라서 이 책의 많은 부분은 그가 사랑하여 기꺼이 생명을 바친 이 나라와 민족을 다룬다.
_“서문” 에서
한마디로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받은 있는 그대로의 한국, 자연이 풍성함을 가져다준 있는 그대로의 한국은 신명기 8장에 그려진 약속의 땅처럼 영광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유교 사상으로 둔해져 버린 이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토지의 비옥도는 평균치 이상이므로 이 나라 사람들이 다 먹고 남을 만한 식량을 생산해 낼 수 있다. 이 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등잔 기름이나 비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무한한 식량 창고이기도 하다. 육지의 바위에는 광맥이 많아 여러 풍부한 광물의 전시장과도 같다. 값지고 유용한 금속도 매우 풍부하다. 목재의 보고인 북쪽의 삼림, 교통 발달의 가능성, 천연 자원과 그 잠재력의 다양성 등은 독실한 신자의 입장에서든 과학자의 입장에서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기 뜻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차지인(借地人)으로서 그리고 주님께 커다란 능력을 부여받은 자로서 이 아름다운 땅 위에 놓인 사람들이, 땅으로 하여금 한층 풍요로운 소출을 내게 하고 바다와 보물창고인 산과 금빛 모래가 풍부한 강으로부터 생활을 편안하고 풍요롭게 하며 더욱 고양시킬 수 있는 물질들을 얻도록 좀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생긴다.
_1장 “하나님의 한국”에서
총명하고 열성적인 아이였던 헨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 잘 훈련받았다. 기독교 신자 양육을 위한 이 우수한 책자는 개인적 신앙 계발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기초로 쓰였으며, 보석처럼 아름다운 생각과 훌륭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거룩한 진리를 실험적으로 알아가는 데서 솟아오르는 신앙적 경건에도 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개인적 헌신의 수단이 되기도 하며 영적인 성찰을 돕기도 한다. 헨리는 소년 시절의 일기에서 이 ‘요리문답 수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유아세례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물로 세례를 받았다. 14세가 되던 해, 집에서 세례를 받은 후 4일 뒤인 1872년 11월 12일, 헨리는 수더턴 근처 임마누엘 개혁교회에서 그에게 세례를 준 피터 피셔(Peter S. Fisher)에게 견신례를 받았다.
_5장 “그리스도의 군병 훈련”에서
그는 제일감리교회(The First Methodist Church)의 기도 모임과 조모임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며,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 연회’의 회의록을 검토하고 감명을 받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선택한 교회가 하고 있는 선한 사업은 내게 기쁨을 준다.” 또 그다음 주일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개혁교회에서 감리교회로 옮기는 문제에 대한 이전의 모든 생각과 논쟁들이 오늘 모두 끝났다. 나는 감리교회의 완전한 신자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택한 일이다.…이 일은 한동안의 기도와 묵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1876년 10월 1일 회개한 이래 나는 주로 감리교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개혁교회에서보다 훨씬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감리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오늘 내가 한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구주를 따르는 웨슬리적 삶의 방식을 그가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감리교의 신자로 받아들여진 것은, 1879년 4월 20일 H. C. 스미스(Smith) 목사가 목회하던 랭커스터 제일감리교회에서였다.
_5장 “그리스도의 군병 훈련”에서
신학생들이 미드홀 내의 커다란 방에 들러 워즈워스, 아펜젤러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화제는 곧 한국으로 옮겨 갔다. 이미 최소한 한 사람-한국에 교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던 한 사람-은 그 주제에 완전히 몰두해 새로이 얻은 지식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을 즐겼으며, 그들이 관심 가지기를 바라면서 질문을 유도하기도 했다. 물론 각자의 관심 정도에 따라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났다.…워즈워스는 새로 문호가 열린 그 지역에 가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자청하여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기까지 했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고국에 머물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를 대신할 것인가? 그는 바로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로 눈을 돌리게 된 아펜젤러였다.
_6장 “한국에 대한 관심”에서
다음 날 비가 오고 많은 사람들이 뱃멀미를 하는 가운데 기선은 출발하여 반도의 남단을 돌아갔다. 섬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안개 낀 만(灣)을 통과하여 드디어 4월 5일, 그들은 수도 서울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항구 제물포에 도착했다. 1620년 미국으로 처음 이민 온 사람 중 메리 칠턴이 플리머스 바위에 첫발을 디딘 것처럼, 한국의 바위에 첫발을 디딘 사람은 아펜젤러 부인이었다. 부활주일이었던 그날, 아펜젤러는 이렇게 기도했다. “오늘 무덤의 빗장을 산산이 부수고 부활한 주께서 그들에게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_8장 “항해와 첫인상”에서
스크랜턴 박사는 목격자의 시각에서 그의 동료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자기에게 닥치는 일을 거절하지도 않고 자기 몸을 아끼지도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하나의 원칙이었다.…설교 다음으로는 교육이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문제였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대학의 모습까지 내다보고 있었으며, 그의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모든 학생들에게서 장래의 국가 고문, 한국을 혁신할 인재, 의의 왕국을 건설할 힘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들을 강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때때로 탈선과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 안에는 그들을 진리로 이끌고 건강한 발전을 꾀하게 해주는 정신이 역사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_14장 “재미있고 유쾌한 가정생활”에서
아펜젤러가 주축이 되어 미국인 개척자들이 구체화시켰던 교육은 이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모든 면에서 한국인의 기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곧 한국인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고 한국의 정신적·사회적·정치적 질병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교육은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것을 가르쳤다. 그것은 훈련의 강조점을 암기에서 판단으로 변화시켰고, 시력을 통찰력으로 변형시켰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원인을 물어보라고 가르쳤으며, 인과관계라는 영원한 법칙을 체득하도록 가르쳤다.…이 민족 앞에 아펜젤러는 목소리와 펜으로 잔치를 베풀고, 생명의 떡을 쪼개 주어야 했던 것이다. 케케묵은 중국의 지식에 짓눌려 있던 젊은이들 대신에, 근대적 삶을 위해 준비된 수백 명의 교사들이 배재학당(培材學堂, The Hall for the Rearing of Useful Men)에서 배출되었다. 이곳에서, 깨어 있는 젊은이들과 탐구적인 성인들이 세계와 인류에 대해 알게 되고 자극을 받아, 예수가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준 자기 민족과 인류의 진보를 위해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_16장 “문자의 독점”에서
아펜젤러에게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가 맡겨졌다. 아펜젤러는 복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다. 그는 마태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과, 마가의 ‘가장 먼저 쓰인 복음’ 그리고 주님의 놀라운 행적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가 쓴 ‘그 시대를 위한 소책자’ 한 쌍을 번역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작업 때문에 그는 머리가 셀 정도였다. 이 번역 개척자는 다이너마이트를 폭파해 구멍을 파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으며, 나름의 도구를 만들어 정확한 용어와 원어에 해당하는 한글 단어를 찾거나 발명해야 했다. 결국 이 작업은 영광스럽게 끝났다. 1900년 9월 9일 한글 신약성경의 완성을 감사하는 예배가 서울의 제일교회에서 열렸다.
_17장 “한국어를 익히다”에서
한국에서의 첫 공중예배는 서울의 남부에 있는 벧엘교회에서 1887년 4월 8일 부활절에 드려졌다. 거기서 아펜젤러는 그의 전도를 받은 첫 회심자인 한 여인에게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가졌다. 그는 이미 일본의 그리스도인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직접적인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한 바 있었다.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세 나라 국적의 신자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세워졌는데, 1904년 스크랜턴 박사는 이 장면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펜젤러 형제는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한국인의 집을 하나 샀다.…처음으로 한국인들과 함께 공적인 예배를 드릴 장소를 마련한 것이다.….”
_19장 “학교와 교회”에서
보울비는 두 명의 한국인(아펜젤러의 비서와 어린 소녀로 추측되는)이 그들의 선실을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두 사람은 갑판까지 가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갑판 앞쪽 절반은 이미 침수되었고 고물은 물 바깥으로 높이 솟아 있었다. 아펜젤러는 매우 흥분한 채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배에서 피신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울비는 고물 쪽으로 달음질쳐 가서 난간에 올라갔다. 배가 가라앉았을 때 사방을 둘러본 그는 아펜젤러가 허리까지 물이 찬 채로 무언가 잡아 보려고 헛손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_25장 “타인의 생명을 구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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