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0일 목요일

마크 놀, 복음주의 지성의 토대를 논하다 [IVP BOOK NEWS 121호]

마크 놀, 출처 - TIME

1994년 마크 놀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을 출간했다. 이 “상처 입은 연인이 부치는 서신”에서, 그는 복음주의 종교 문화의 반지성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의 「그리스도와 지성」은 비판에는 지면을 훨씬 적게 할애하고, 대신에 그리스도인의 학문의 토대를 세우기 위한 비전, “기독교 신앙의 기초적인 진리들이 그리스도인의 학문의 열쇠다”임을 제시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편집인 데이비드 네프(이하 네프)가 이 책에 관하여 노트르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마크 놀(이하 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프: 「그리스도와 지성」의 중심 주제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을 출간할 당시보다 지금 복음주의 지성의 상태에 관해 더 낙관적이신가요?

: 더 낙관적입니다. 전적으로 그렇지는않지만요. 현대 서구 문화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이 여타 진지한 지성의 삶을 밑에서부터 허물어버린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독교적 지성의 밑동을 잘라버렸습니다. 진지한 성찰의 근간을 스스로 허문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경향도 여전히 매우 강합니다. 예를 들면 대중주의(populism)와, 문제가 있다면 지금 당장 해결해버려야 한다는 즉각주의(immediatism)가 있습니다.



네프: 다른 상황들에서는 이런 것들이 강점으로 작용하지요.

: 맞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복음주의 세계 안에서 진지하고 냉철한 사고의 근간을 허무는 거의 모든 것들이, 실제로 복음주의적 삶의 다른 측면에서는 생산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고가 가장 중요하다고 단정하여 말하고 싶었던 적은 전혀 없지만 사고는 매우 중요합니다. 칭찬 받을 만하고 매우 진지한 향상을 보여 주는 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 궤적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요. 그리스도인 철학자들이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을 해냈습니다. 진지한 노력을 하고 있는 기독교 대학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고요. 또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선하고 확고한 사고를 자극하고 있고,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넓은 학문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기꺼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출판사들이 좋은 책을 많이 내놓고 있고, 기독학생회(IVF) 학사·교수회 같은 파라처치들도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인데(그리고 역사학자의 유전적 비관주의일 것 같기도 한데), 그리스도인들의 상당한 지성적 기여가 더 넓은 강물로 흘러들어가려면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네프: ‘와 보라’를 과학을 하라는 그리스도의 초대라고 하셨습니다.

: 이 책의 전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원과 미래 교회의 소망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지적 문제들을 고찰하는 기초 관점을 제시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무엇보다도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임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장, 고린도전서 1장, 히브리서 1장 모두 똑같이 말합니다. 단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만물을 창조하셨다’ 고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다.”는 고린도전서 1장 말씀은 참 놀랍지요. 복음서에서 우리는 탐구할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실제로 탐구해야 한다는 말씀이 반복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어떤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물었을 때, 빌립은 ‘와 보라’라고 대답했죠.
  제가 제안하는 것은 관찰과 경험을 타당한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취급하는 베이컨의 경험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곧 열린 지성을 가진다는 것이며, 이 열린 지성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을 통해 길러진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경험적 방법론으로 열린 지성을 가집니다. 자연에 대한 책임 있는 실험이 이루어질 때, 그 관찰자가 발견하는 것은 단지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창조되고 섭리에 의해 보존되는 자연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초점을 갖고서 자연에 대한 연구를 하고자 한다면, 열린 마음과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과학에 대한 그리스도의 적실성이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또한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에게 자연을 탐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을 탐구할 때 우리에게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에 대한 열린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와 보라’인 것입니다.



네프: 특별히 복음주의자들 내부의 과학적 논쟁점들과 관련하여, 속도를 늦추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는 최고의 방식일 수 있다고 제안하시는 것 같습니다.

: 종교와 과학 사이의 이른바 ‘갈등’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들은 결론을 너무 성급하게 내리는 데서 기인합니다. 중세 시대로 돌아가 보면, 자연 안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새로운 발견들이 잇따랐을 때, 교회 지도자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응했습니다. 한참이 흐른 뒤에야 그리스도인들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여기 설명이 있다”고 말하게 되죠.
  마르틴 루터도 장 칼뱅도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돌 수 있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세대가 지난 다음에 루터교인들과 칼뱅주의자들, 가톨릭 신자들 모두 지구가 태양을 공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죠.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주장에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이상적이었을 것입니다. “자, 시간을 갖고 성경과 분명하게 대치되는 이것을 가능한 한 주의 깊게 그리고 공평하게 평가해 봅시다.” 그런데 그 대신에 쓸데없는 교리적 반작용이 나타났지요.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자세히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저에게 없습니다만, 역사학자로서 저는, 끈기 있는 연구를 경시하지 말고 더 많이 노력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네프: “그리스도인의 학문 활동을 위해서는, 가정생활·정치·지역사회 봉사·경제 활동·의료 활동 같은 것들도 똑같이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이렇게 쓰셨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학문 활동은 기독교와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육, 그리스도인의 출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치 모두가 기독교와 함께 시작해야 하듯 말이죠.
  학문 영역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많은 부분들은 문제를 그리스도께 중심을 둔 기초로 돌려놓지 않는 데서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책의 첫 부분을 위대한 기독교 신경들의 기독론적 확증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데 상당히 많이 할애한 이유입니다. 이 신경들이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그 자체로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강도 높은 토론에 의해 단련되었고 생산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이 전진하는 길은 가정생활과 정치와 일체의 모든 윤리적 영역에서 그리스도께 중심을 둔 기초로 되돌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다른 차원들에서 전진하는 길이라면, 이것은 또한 지성의 삶에서도 전진하는 길입니다.



■ 이 인터뷰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의 허락을 얻어 게재하였습니다. 지면 관계상 편집하였으며, 전문은 2015년 9월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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