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6일 토요일

전설이 된 폴 투르니에[IVP BOOK NEWS 119호]

[작가열전]

기독교 작가도 유행을 탄다. 한때는 누구나 손에 들고 다니던 화제작들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작가들 가운데 일부는 전설이 되며, 우리는 그들의 저작을 가리켜 고전이라 부른다. 이미 저 하늘의 별이 된 폴 투르니에야말로 바로 그 전설 중의 하나이며, 그의 「인간이란 무엇인가」(포이에마)는 기독교와 의학, 그리고 심리학을 융합시킨 고전이 되었다.

폴 투르니에의 사유 체계는 하나님-마음­-육체의 삼중 구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특유한 균형 감각은 서구 지성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근대적 분화 체계에서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논란도 일으켰다. 풍부한 일화와 서민적 문체로 쓰인 그의 책을 미국이 주목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게다.

그런데 고전에는 낡았다(古)는 뜻도 들어있다. 당장 폴 투르니에가 내세우는 남녀의 성차에 대한 진부한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난감한 노릇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항대립의 근대적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가령 페르소나(가면)-인격, 남성-여성 등이 그 예다(「강자와 약자」(IVP)는 조금 달리 접근한다). 그 역시 시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폴 투르니에의 한계와 단점을 더 언급하지는 않겠다(이에 대해서는 「폴 투르니에의 기독교 심리학」(IVP)을 참고하라). 그저 우리가 그를 바라보는 시각을 현실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 한다. 문화적 격차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고전 숭배는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투르니에의 빛과 그림자는 그가 근대인이라는 것에 기인한다.


관계 형성의 교사 폴 투르니에

하지만 폴 투르니에는 근대 안에서 살아간 시대의 자녀인 동시에 근대 너머를 바라본 자유인이기도 하다. 세련된 논증 대신에 생생한 일화로 접근하는 투르니에 특유의 방식을 통해 그가 내러티브와 대화의 힘을 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결국 관계의 문제로 수렴되며, 이러한 문제의식은 모든 저작에 스며 있다.


가령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IVP)를 통해 제시된다. 단지 여기 담긴 내용은 원론적이라서 부부에 따라 적용 양태는 다소간 상이할 수밖에 없다. 「비밀」(IVP)은 기본적으로 자아 형성 과정의 길항관계를 탐구하지만(「인간의 자리」(NUN)도 이런 점에 천착한다), 특히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도움이 되며, 미성숙한 자녀를 둔 부모들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폴 투르니에의 치유」(CUP)에서 잘 드러난다. 투르니에는 질병이 아니라 마음(인격)을 치유하고, 환자를 사례가 아닌 인격으로 볼 것을 권한다. 다시 말해 온전한 치료를 위해서는 의료 기술을 넘어서야 하며, 인격적 만남과 대화에 기초해야 한다.

반면 「강자와 약자」(IVP)는 의사와 환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포괄하는 상위의 맥락에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 문제를 다룬다. 투르니에는 강자의 불안과 폭력이나 약자의 수치와 절망 이면에는 결국 동일한 본성과 동일한 고통이 자리한다고 본다. 이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적인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삶의 철학자이자 세상의 치료자 폴 투르니에

폴 투르니에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관계와 더불어 우리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통찰을 준다. 「인생의 사계절」(아바서원)은 인생을 사계절의 주기에 맞추어 묘사한다. 내용상 직관적으로 이해되고, 분량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품이다.

「폴 투르니에의 선물」(새물결플러스)은 우리의 삶을 하나의 선물(사랑)로 보도록 이끈다. 이에 더해 「모험으로 사는 인생」(IVP)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모험이라는 모티브로 풀어낸다. 이는 투르니에의 인생론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관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책이 「고통보다 깊은」(IVP)이다. 여기에서 투르니에는 고통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 창조성을 유발한다고 조명한다.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야 속에서 투르니에는 세상의 아픔을 치료하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여성 그대의 사명은」(IVP)을 그저 여성론 정도로 읽으면 곤란하다. 투르니에는 근대의 경직된 남성적 질서에 여성의 따뜻한 공감적 태도를 맞세우고 있다. 도구적 이성으로 뒤틀린 현대인의 뒤틀린 삶의 병폐에 대한 해법으로 이를 제시한 것이다. 「고독」과 「죄책감과 은혜」(이상 IVP)는 현대인의 무너진 내면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집필한 책들이다. 고독감과 죄책감은 현대인의 병리적 정서다. 투르니에는 세상을 일그러뜨리는 고독감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를 대안으로 내놓는다. 또한 그는 남의 판단에 의존하는 거짓된 죄책감에 대해 비판하며, 이에 대해 죄의 고백과 용서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기독교 영성의 지도자 폴 투르니에

이제까지 본 바와 같이 폴 투르니에의 저작은 대체로 기독교적인 결론으로 종결된다. 더욱이 그가 진단하는 문제의 해법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묵상으로 귀결되기 일쑤다. 그 자신이 매일 묵상을 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렸고, 또한 이를 글로 받아 적었기 때문이다.

고교 교사(뒤부아), 옥스포드 그룹의 일원, 아내(넬리) 등이 그를 위한 심리 치료자라고 하는 큰 역할을 했지만, 정작 그 자신의 영성 함양을 위한 기반이 된 것은 바로 묵상이었다. 폴 투르니에의 묵상론은 「현대인의 피로와 휴식」(나침반)이라는 소책자가 잘 보여 준다. 물론 묵상이라는 해법 자체에 대해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포이에마)나 「귀를 핥으시는 하나님」(불꽃) 등에서 여러 차례 제시되었다. 그에게 있어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이었다(어떤 이에게는 묵상이 자기의 이해를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폴 투르니에를 간단하게 살펴봤다. 더욱이 그의 책은 적잖이 번역 소개되었다. 하지만 그의 전작주의자가 되는 것보다(애초에 모든 책을 소개하지도 않았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필요한 메시지를 담은 책을 골라 꼼꼼히 읽는 편이 낫다. 물론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여는) 묵상과 (이웃의 말에 귀를 여는) 대화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 폴 투르니에 대한 체계적 조망을 원한다면 「폴 투르니에의 기독교 심리학」(IVP)이, 투르니에 자신의 글을 모은 얇은 책 하나로 그의 사유 세계를 간결하게 살펴보려면 「귀를 핧으시는 하나님」(불꽃)이 가장 좋다.






이원석 | 총체적 난국에 처한 한국 기독교를 위해 필요한 것은 교양 교육이며, 바로 이를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다고 믿는다. 저서로는 「거대한 사기극」, 「공부란 무엇인가」, 「인문학 페티시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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