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6일 토요일

십자가 아래서 제자도를 곱새기다[IVP BOOK NEWS 119호]

[서평]
세상을 바꾼 한 주간
십자가 영성을 찾아 떠나는 40일 여정
김영봉 지음 | 무선 324면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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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한 주간」은 IVP 직영서점 산책에서 가장 먼저 만나보실 수 있고, 
YES24, 교보문고, 알라딘, 인터파크, 반디앤루니스 등 주요 온라인 서점과 
갓피플몰, 라이프북 등의 기독교 온라인 서점 및 지역 서점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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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꾼’ 영웅

제목만 보고는 예수님의 수난 주간을 가리키는 줄 미처 생각 못했다. ‘세상을 바꾼’이라는 수식어에서 진즉 프랑스대혁명이나 종교개혁 같은 세계사적 사건만을 떠올린 탓이다. 세상을 바꾼 정도라면 말 그대로 ‘낡은 체제’(ancien régime)를 혁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건쯤은 되어야 하지 않나 싶었던 거다. 그런데 제 발로 죽으러 간, ‘반란죄’라는 모함을 뒤집어쓴 채 정치범의 최후인 십자가형으로 생을 마감한 그 시간이 세상을 바꾸었다?

그보다는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마 26:53)로 꾸린 ‘어벤져스’를 거느리고 보검을 휘두르며 진격하는, 로마제국 타도의 기치를 내건 전쟁이 그에 어울리지 않나 말이다. 그래야 제대로 ‘세상을 바꾼’ 스펙터클한 스토리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세상 나라를 전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식이 아니었다.

“주님의 소명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칼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칼과 창보다 더 큰 힘이 있었습니다.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를 동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식으로 한 군단은 6천 명이었으니, 엄청난 수의 천사를 부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p. 222)

“조국 해방에 대한 열망을 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가룟 유다의 관점에서는, 놀라운 표적들을 일으킨 스승의 능력으로 로마 제국을 단숨에 뒤엎고 유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이루는 것이 ‘새 세상’의 비전이었을 터이다. 그러니 ‘세상을 바꾼 한 주간’은 가룟 유다에게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같은 스승의 모습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시간이었을 테고, 당대의 종교 기득권층인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는 기득권의 치명적 위협 요인을 제거하는 음모와 계략의 시간이었으며,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는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보호하려고 발버둥친”(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충분히 옳은 일을 할 수 있었음에도) 시간이었다. 그리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로서는 자신들의 허약하고 연약한 믿음과 제자도의 실패를 처절히 경험한 시간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이 한 주는 어떤 의미인가? 

작년 사순절 기간 동안 지은이가 “매일 한 단락씩 집중하여 본문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정리”한 「세상을 바꾼 한 주간」에서 경험하는 ‘한 주간’은 “십자가를 새롭게 만나는 여정”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대한 설명은 십자가의 인류사적 의미를 새롭게 각성하게 한다. 즉,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당신 자신의 개인적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갑작스럽게 패닉에 빠진” 인간의 모습이라고 쉽사리 결론내릴 수 없다. 십자가 죽음이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측정불가한 무게의 죗값을 치르는 것이었음을 고려하면, 겟세마네 기도에 담긴 예수님의 고민과 두려움이 이해된다는 것이다.

책에서 특히 절실히 공감하며 묵상한 대목은 바로 빌라도에 관한 통찰에 이르러서였다.

“빌라도를 떠올리며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빌라도처럼 행동하는지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침묵하기도 하고, 모른 체하기도 합니다. 양심은 소리치지만, 우리는 못들은 체 외면합니다. 공연한 일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시간과 정력을 쓸데없는 일에 허비하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의 일로 해를 입지 않으려고. 그와 같은 침묵과 외면으로 인해 악은 더욱 번성하고 불의가 활개를 칩니다. 빌라도는 2천 년 전에 살았던 한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빌라도가 됩니다.”(p. 252)

그렇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빌라도가 된다. 아니,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가만히 있으려는 침묵과 외면, 그리고 이를 변호하거나 감추려는 “교활한 죄성”을 지닌 우리가 곧 빌라도다!


더욱 폭넓게 이해되는 예수님의 한 주

「세상을 바꾼 한 주간」은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주해가 충실히 담겼는데, 그렇다고 독서와 묵상이 방해받거나 영적 도전이 약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역사적 신학적 풀이가 주는) 평소 의아해하던 성경 본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유익과, 영적 통찰이 담긴 메시지가 주는 도전을 고스란히 함께 누리게 되는 건 글쓴이의 온축된 공부와 깊은 묵상 덕분일 터다. 일례로, 예수살렘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며 분노하신 성전 정화 사건에 대한 대목이 그렇다.

“[예루살렘] 성전 본채 바깥에 있는 광장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릅니다.…이방인의 뜰에는 돈 바꾸는 사람들과 제물로 쓸 짐승을 파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통용되던 동전에는 이교 신상이나 황제의 상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통용되는 돈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한편 제사장의 검사에 반드시 통과할 만한 흠 없는 짐승을 파는 상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제사장들과 결탁하여 이권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상인들은 제사장들을 등에 업고 부당한 이득을 챙기고, 그중 일부를 제사장들에게 상납한 것입니다…제사장의 권력을 등에 업고 부당 이득을 착복하는 상인도 강도요, 그들의 뒤를 봐주면서 이득을 챙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도 강도입니다. 그들의 부정을 환히 알면서도 오직 자신이 받을 복을 바라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도 강도입니다. 그들은 가정과 일터에서 부정하고 불의하게 행동하면서도 제사만 잘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강도로 규정하셨습니다.”(pp. 23-24)

‘달란트 비유’에 대한 풀이도 이에 못지않게 인상 깊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동일한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하늘나라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최선이지 최고가 아닙니다. …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가 엄청난 차이지만, 주님은 그것을 보시지 않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성실하다는 점에서 같다면, 동일한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달리 말하면, 능력은 다를 수 있지만 성실함은 같을 수 있습니다.”(p. 170)

「세상을 바꾼 한 주간」은 예수의 생애 마지막 한 주에 대한 마태복음의 기록을 통해 십자가의 길을 걷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고 듣고 곱새기게 한 뒤 마침내 결단하도록 이끈다. 그러니 이 책은 ‘묵상적 읽기’를 통해 독서-묵상-기도가 어우러지는 방식이 유익할 것이다. 아니, 읽다 보면 어느새 묵상과 기도에 잠겨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옥명호 | 책보다는 드라마를, 드라마보다는 영화를 더 좋아한다. 월간 《복음과상황》 편집장으로,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10대를 위한 인생 잠언' 「답 없는 너에게」(홍성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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