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1일 화요일

과학과 신앙의 올바른 터를 세우다[IVP BOOK NEWS 120호]

과학 철학: 자연 과학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
델 라치 | 김영식·최경학 옮김 | 262면 | 11,000원



--------------------------------
「과학 철학」은 IVP 직영서점 산책(02-3141-5321)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오해로부터

추위를 머금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과학과 신앙, 오해에서 이해로!’라는 세미나가 열렸다. 첫 모임은 싸늘한 날씨만큼이나 경직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IVF 중앙회관의 어느 작은 공간에 서로 다닥다닥 붙어 앉아 받아 보았던 연두색 책과 송인규 교수님의 꼼꼼한 강의안. 우리는 그때 불현듯 이 모임에 대해 한 가지 오해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오해는 세미나에서 함께 공부하게 될 책이 상당히 생소하고 어렵다는 데 있었다. 물론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지만, 별다른 노력 없이 수월하게 그 목표를 이루리라 여긴 그 기대가 문제였다. 정말이지 큰 착각이었다.

이쯤에서 책 제목을 밝혀야 하겠다. 과학과 신앙 세미나에서 다루었던 문제의 책은 바로 「과학 철학」(Science & Its Limits)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과학에 대한 철학’을 담은 책이고, 과학책보다는 오히려 철학책에 더 가깝다. 이제, 과학이라는 가면을 쓴 철학의 부담스러운 얼굴을 살짝 들여다보자.


과학(Science), 시대별 정의 및 종교와의 관계

저자는 먼저 과학 자체에 대해 다룬다. 과학에 대한 견해를 크게 세 시기, 즉 17-20세기 중반, 1960-1970년대, 오늘날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저자는 이러한 구분을 위해 객관성, 경험성, 합리성이라는 기준을 제시한다. 객관성은 과학 활동과 인간의 주관성과의 관계를, 경험성은 과학 활동과 관찰 가능한 경험 자료와의 관계를, 마지막 합리성은 과학 활동과 추론 과정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첫 번째 시기의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과학 활동에 과학자의 주관적 전제가 개입해서는 안 되고(객관성↑), 철저히 관찰 가능한 경험에만 근거해야 하며(경험성↑), 논리적 추론 과정을 통해서만 과학적 결과물이 도출되어야 한다(합리성↑).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두 번째 시기에 와서 뒤집힌다. 토마스 쿤으로 대변되는 급진적 견해에 따르면 과학 활동 전체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과학자의 주관적 선입견이고(객관성↓), 그러한 방향성은 경험적 자료의 영향을 미약하게만 받으며(경험성↓), 결과물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논리적 추론보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적 영향력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합리성↓).

첫 번째 시기에는 과학을 순전한 사실의 문제로 다루지만, 두 번째 시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가치의 문제로 여긴다. 한편 오늘날은 그 양극단의 주장을 적절히 받아들이며 중도를 걷고자 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과학은 사실을 다루기도 하지만 또한 가치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세 시기의 견해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첫 번째 시기의 전통적 견해는 과학과 종교가 별개라고 주장하지만, 두 번째 시기의 급진적 견해는 과학과 종교가 혼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세 번째 시기에는 중도적인 견해가 우세한데, 이는 과학과 종교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중 과학에 대한 중도적 견해를 지지하며 그에 따른 과학과 종교의 적절한 연관성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그리고 과학과 종교는 날카롭게 분리되거나 무분별하게 혼합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통합의 가능성에서 기독교 신앙을 과학 활동 안에 정당하게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과학의 한계(Its Limits) 속에서 등장하는 지적 설계

한편 저자는 과학의 한계를 드러내며 지적 설계를 넌지시 내세운다. 과학은 그 자신의 토대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가령 과학은 ‘균일성의 원리’, 즉 자연이 균일하다는 가정을 증명 없이 그저 받아들인다.

과학은 ‘목적’에 대해서도 말해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저자는 과학이 ‘목적’에 대해 말해 줄 수 없다는 주장이 피상적인 견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특히 관찰될 수 없다는 이유로 ‘목적’이 과학 영역에서 거부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따지면 전자와 쿼크, 장같이 직접 관찰될 수 없는 것들도 과학의 영역에서 제외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목적’은 과학에서 으뜸가는 설명적 범주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자는 ‘목적’을 과학 영역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모든 것을 자연주의적 설명으로 환원하려는 과학주의의 부당성을 언급한다. 관찰 가능한 것만 과학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그 자연주의 세계관은 기실 많은 문제점이 있고, 바로 여기에서 과학의 진정한 한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저자는 자연주의 세계관에 근거한 과학의 문제점과 한계에서, 그 과학이 희생시킨 ‘목적’ 개념을 포함하는 지적 설계를 등장시킨다. 지적 설계가 과학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저자의 속내는 분명하다.


이해를 향하여

이 책은 드러나는 현상뿐 아니라 현상 이면의 본질과 개념을 다룬다는 점에서 세계관적이다. 또한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중립적으로 각 입장을 소개하기에 교과서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과학 철학의 개념어들과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저자의 입장 때문에 당황했고, 책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세미나를 통해 과학에 대한 피상적이고 치우친 이해에서 벗어나, 과학과 종교를 통합하는 방식에 대해 심도 있고 균형 있게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이번 세미나가 앞으로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리라는 기대와 함께, 향후 열릴 과학과 신앙 세미나를 통해 과학과 신앙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더욱더 성숙해지리라는 기대도 커졌다.

세미나 마지막 날, 함께했던 멤버 모두가 다음에 열릴 ‘과학과 신앙 세미나’에서 다시 만나자고 그랬다. 돌아보니 마지막 날은 첫 날과 달리 몇 가지 바뀐 점이 있었다. 초여름의 화창한 날씨, 자리를 옮겨 넓어진 세미나 장소,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 그리고 오해가 아닌 이해 말이다.



김태민|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다니엘새시대교회에서 중고등부를 섬기고 있다. 신학과 철학의 통합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사역에 있어서는 신앙과 삶의 통합에 힘쓰고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