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1일 화요일

일그러진 한국 교회, 희망은 어디에?[IVP BOOK NEWS 120호]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라는 너무도 지당한 표어를 보며, 자부심보다 낯 뜨거움을 느낀다. 세상은 교회를 보며 탄식하고 절망하는데, 우리 입으로 당당하게 그런 슬로건을 외친다는 것이 참으로 민망하고 볼썽사납다. 그래도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라고 외쳐야 하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물론 그래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는 참담한 현실에 대한 깊은 자성과 회개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슬로건을 내거는 것은 암울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영적 어두움과 교만, 우리의 비참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부끄러움과 애통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뻔뻔함과 강퍅함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현실은 가히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만물을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만물을 회복하고 새롭게 하며 만유를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와 능력으로 충만케 하는 영광스러운 공동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스르는 완고함과 부패 때문에 교회는 누추하고 초라해졌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배격하면,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과 생명이 충만히 거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소멸되는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전락하고 만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과 생명을 밀어냄으로 세상에 흘려보낼 부활의 생기와 성령의 생명수가 고갈되는 것이다. 심각한 자성이 필요하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주님이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위하는 무한한 열심과 사랑에 있다. 당신의 피를 흘려 교회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셨는데 어찌 교회를 쉽게 포기하시겠는가. 교회에 건 당신의 이름과 영광과 존귀를 회복하시기 위해서라도 주님이 일어나실 것이다. 그러나 그 회복과 부흥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우리의 교만한 자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은밀히 세상의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옛 자아의 처절한 죽음과 함께 임할 것이다. 이 죽음은 옛 자아 중심의 삶에 넌더리가 나고 그로 인해 마음이 부서지는 애통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세상과 육신에 대해 못 박힌 십자가가 교회의 한복판에 복귀될 때 교회는 다시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세상의 희망이 될 것이다.



타협인가 닦달인가

영적으로 어둡고 침체한 시기일수록 현실 교회와 성경적 기준의 괴리는 심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개 두 가지 극단적 현상이 나타난다. 현실을 무시하고 성경적인 이상으로 교인들을 닦달하거나, 역으로 현실의 수준에 맞추어 성경적인 이상을 타협하는 것이다.

교인들의 육적이고 세속적인 욕구에 부응하여 복음을 왜곡하는 것은 가장 노골적이고 저급한 타협이다. 현실적인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시급한 현실의 필요를 채워 주어 이 땅에서 잘 살게 하고, 사후에는 천국 복락까지 덤으로 얻게 하는 방편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질시키는 것이다. 혈관 속 깊이 샤먼이 흐르는 우리 민족에게 이런 방식이 가장 잘 먹힌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기복 신앙과 번영 신앙이 그 실증이다.

세련되고 은밀한 고차원의 타협도 있다. 이런 시도는 복음을 세속적인 욕망과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는 방편으로 제시하는 것을 혐오하고 비판한다. 매우 고상하고 의식 있는 메시지로 들린다. 또한 교인들의 실존의 깊이에 대한 이해와 공감력이 뛰어나, 그들의 심령에 공명을 일으킨다. 성경적 당위만 외치며 교인들을 닦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성경으로 현실을 진단하고 나아갈 바를 모색하지 않고, 우리의 실존을 통해 성경을 읽으면서 비정상적인 우리의 모습을 교묘하게 성경적으로 합리화한다. 그래서 한없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성화 과정에 자폭하지 않도록 엄청난 위로를 안겨 준다. 그러나 성경을 우리의 저조한 영적인 상태와 경험의 스크린을 통해 걸러내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모호함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런 타협은 상당한 영특함과 논리적인 일관성과 설득력을 소유해야만 가능하며 대부분의 교인들과 목회자들마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거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라

서구 신학에서 칼 바르트를 보편적으로 말씀의 신학자라고 칭하는데, 보수 신학에서는 말씀에 대한 그의 견해에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나도 그의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공감되는 대목이 있어 인용해 본다.

바르트는 성경이 기록된 말씀이라면, 설교는 전파되는 말씀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에 기록된 말씀이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전파될 때 더 온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했다. 성령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인격으로 찾아와 우리에게 말을 거신다. 성령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맞닥뜨림, 곧 인격적인 만남 속에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특별한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말씀하셨음이 지금 말씀하심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성령이 그 매개자로 불완전하고 허점투성이인 설교자를 사용하신다. 성령은 설교자의 모든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술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들려주신다. 이렇게 말씀의 보화가 설교자라는 비천한 인간에게 담겨지는 것은 일종의 말씀의 성육화(물론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곧 자기비하인 셈이다. 설교자가 얼마나 성경에 충실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 하나님과 원활히 소통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음성은 선명하게 들리기도 하고 모호하게 왜곡되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설교자가 말씀과 성령에 사로잡혀야 할 책임이 있다.



박영돈| 현재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의학 교수로 섬기고 있으며, 한국교회 성령 운동의 문제점을 분석한「일그러진 성령의 얼굴」과 한국교회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제시한「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이상 IVP)을 썼다. “칭의와 성화”를 주제로 한 다음 책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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