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6일 수요일

기도의 불이 꺼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 「신약의 모든 기도」




기도, 잘 하고 계신가요?
예전에는 안부 인사한답시고 "성경 잘 읽고 있니, 기도는 열심히 하니" 등 묻기도 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참 부담스러운 인사였네요.

소원을 들어 달라는 기도보다는 뭔가 거창한 기도제목을 펼쳐야 할 것 같은데
그러자니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고,그러다 보면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잘 기도할 수 있을까요?
옛날 사람들은,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을까요?



가장 오래된 기도의 교본, 신약 성경으로부터 기도의 비밀을 배운다



   신약의 모든 기도: 예수님과 사도들을 따라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다
New Testament Prayer for Everyone

톰 라이트 | 백지윤 옮김
140*200 | 216면|12,000원
2015년 8월 28일 발행


톰 라이트, 21세기의 C. S. 루이스

대중 저술가이자 최고의 성경신학자인 톰 라이트가, 이번에는 기도와 관련된 신약 성경 말씀들을 해설하고 묵상했습니다.

오늘날 기도에 대해서는 수많은 가르침들이 난무하지만, 근거 없는 민간 처방들로 인해 오히려 혼란이 야기되고 있지요. 이럴 때일수록 기도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약의 모든 기도」구성

먼저 1부 "기도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저자는 신약 성경 속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드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또 그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이며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기도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2부 "신약 성경의 기도"에서는 신약 성경의 기도들 하나하나를 읽어나가며 해설합니다. 기도에 대한 톰 라이트의 해설에서 우리는 섬세하고 개인적인 적용점과 함께 개인의 삶에만 매몰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시각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흘러나오는 변함없는 기도의 불빛은
언제든 우리 기도의 초를 위한 불씨가 되어 줄 것이다!


서문에 보면 "성냥은 한 개도 남지 않았고, 더 이상 불을 켤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표현들이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제 마음은 불이 꺼진 지 한참 오래 되어 잿더미만 남은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톰 라이트는 신약의 기도들이 우리 마음에 꺼져 있는 등불에 다시금 새로운 기도의 불씨를 되살릴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용기를 줍니다.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의 필치는 참 재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술술 읽어 내려가는 동안 톰 라이트의 안내를 받아 성경의 오솔길로, 기도의 시내로 들어가, 자연스레 신약 성경의 기도에 젖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삶에 사로잡혀 보자

기도하기 어려운 시기, 기도의 불이 꺼진 지 오랜 삶 속에서도 우리가 다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의 불씨를 옮겨 붙일 수 있는 불꽃이 여전히 신약 성경 속에서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 책에서 성경 속에서 소리 없이 빛을 발하는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기도들의 진면목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 속 성도들과 함께 이 기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의 기도는 메마른 습관을 넘어 우리 삶의 심장박동이 될 것입니다.

‘에브리원 주석 시리즈’의 애독자는 물론 아직 톰 라이트를 접해보지 않은 독자들도 이 책을 통해 톰 라이트의 정곡을 찌르는 통찰과 신앙과 학문이 통합된 경건한 성경 강해의 정수(精髓)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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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모든 기도」는 IVP 직영서점 산책에서 가장 먼저 만나보실 수 있고, 
여러 지역 기독교 서점과
YES24, 교보문고, 알라딘, 인터파크, 반디앤루니스 등 주요 온라인 서점,
갓피플몰, 라이프북 등의 기독교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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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0일 목요일

마크 놀, 복음주의 지성의 토대를 논하다 [IVP BOOK NEWS 121호]

마크 놀, 출처 - TIME

1994년 마크 놀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을 출간했다. 이 “상처 입은 연인이 부치는 서신”에서, 그는 복음주의 종교 문화의 반지성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의 「그리스도와 지성」은 비판에는 지면을 훨씬 적게 할애하고, 대신에 그리스도인의 학문의 토대를 세우기 위한 비전, “기독교 신앙의 기초적인 진리들이 그리스도인의 학문의 열쇠다”임을 제시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편집인 데이비드 네프(이하 네프)가 이 책에 관하여 노트르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마크 놀(이하 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프: 「그리스도와 지성」의 중심 주제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을 출간할 당시보다 지금 복음주의 지성의 상태에 관해 더 낙관적이신가요?

: 더 낙관적입니다. 전적으로 그렇지는않지만요. 현대 서구 문화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이 여타 진지한 지성의 삶을 밑에서부터 허물어버린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독교적 지성의 밑동을 잘라버렸습니다. 진지한 성찰의 근간을 스스로 허문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경향도 여전히 매우 강합니다. 예를 들면 대중주의(populism)와, 문제가 있다면 지금 당장 해결해버려야 한다는 즉각주의(immediatism)가 있습니다.



네프: 다른 상황들에서는 이런 것들이 강점으로 작용하지요.

: 맞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복음주의 세계 안에서 진지하고 냉철한 사고의 근간을 허무는 거의 모든 것들이, 실제로 복음주의적 삶의 다른 측면에서는 생산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고가 가장 중요하다고 단정하여 말하고 싶었던 적은 전혀 없지만 사고는 매우 중요합니다. 칭찬 받을 만하고 매우 진지한 향상을 보여 주는 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 궤적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요. 그리스도인 철학자들이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을 해냈습니다. 진지한 노력을 하고 있는 기독교 대학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고요. 또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선하고 확고한 사고를 자극하고 있고,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넓은 학문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기꺼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출판사들이 좋은 책을 많이 내놓고 있고, 기독학생회(IVF) 학사·교수회 같은 파라처치들도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인데(그리고 역사학자의 유전적 비관주의일 것 같기도 한데), 그리스도인들의 상당한 지성적 기여가 더 넓은 강물로 흘러들어가려면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네프: ‘와 보라’를 과학을 하라는 그리스도의 초대라고 하셨습니다.

: 이 책의 전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원과 미래 교회의 소망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지적 문제들을 고찰하는 기초 관점을 제시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무엇보다도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임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장, 고린도전서 1장, 히브리서 1장 모두 똑같이 말합니다. 단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만물을 창조하셨다’ 고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다.”는 고린도전서 1장 말씀은 참 놀랍지요. 복음서에서 우리는 탐구할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실제로 탐구해야 한다는 말씀이 반복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어떤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물었을 때, 빌립은 ‘와 보라’라고 대답했죠.
  제가 제안하는 것은 관찰과 경험을 타당한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취급하는 베이컨의 경험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곧 열린 지성을 가진다는 것이며, 이 열린 지성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을 통해 길러진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경험적 방법론으로 열린 지성을 가집니다. 자연에 대한 책임 있는 실험이 이루어질 때, 그 관찰자가 발견하는 것은 단지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창조되고 섭리에 의해 보존되는 자연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초점을 갖고서 자연에 대한 연구를 하고자 한다면, 열린 마음과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과학에 대한 그리스도의 적실성이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또한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에게 자연을 탐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을 탐구할 때 우리에게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에 대한 열린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와 보라’인 것입니다.



네프: 특별히 복음주의자들 내부의 과학적 논쟁점들과 관련하여, 속도를 늦추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는 최고의 방식일 수 있다고 제안하시는 것 같습니다.

: 종교와 과학 사이의 이른바 ‘갈등’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들은 결론을 너무 성급하게 내리는 데서 기인합니다. 중세 시대로 돌아가 보면, 자연 안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새로운 발견들이 잇따랐을 때, 교회 지도자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응했습니다. 한참이 흐른 뒤에야 그리스도인들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여기 설명이 있다”고 말하게 되죠.
  마르틴 루터도 장 칼뱅도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돌 수 있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세대가 지난 다음에 루터교인들과 칼뱅주의자들, 가톨릭 신자들 모두 지구가 태양을 공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죠.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주장에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이상적이었을 것입니다. “자, 시간을 갖고 성경과 분명하게 대치되는 이것을 가능한 한 주의 깊게 그리고 공평하게 평가해 봅시다.” 그런데 그 대신에 쓸데없는 교리적 반작용이 나타났지요.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자세히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저에게 없습니다만, 역사학자로서 저는, 끈기 있는 연구를 경시하지 말고 더 많이 노력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네프: “그리스도인의 학문 활동을 위해서는, 가정생활·정치·지역사회 봉사·경제 활동·의료 활동 같은 것들도 똑같이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이렇게 쓰셨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학문 활동은 기독교와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육, 그리스도인의 출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치 모두가 기독교와 함께 시작해야 하듯 말이죠.
  학문 영역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많은 부분들은 문제를 그리스도께 중심을 둔 기초로 돌려놓지 않는 데서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책의 첫 부분을 위대한 기독교 신경들의 기독론적 확증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데 상당히 많이 할애한 이유입니다. 이 신경들이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그 자체로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강도 높은 토론에 의해 단련되었고 생산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이 전진하는 길은 가정생활과 정치와 일체의 모든 윤리적 영역에서 그리스도께 중심을 둔 기초로 되돌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다른 차원들에서 전진하는 길이라면, 이것은 또한 지성의 삶에서도 전진하는 길입니다.



■ 이 인터뷰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의 허락을 얻어 게재하였습니다. 지면 관계상 편집하였으며, 전문은 2015년 9월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혼자 오지 않으셨다 [IVP BOOK NEWS 121호]

[서평]

뜻밖의 손님

데이비드 짐머만 | 이지혜 옮김 | 최정인 그림ㅣ양장 64면 |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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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날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신다면 나는 어떤 표정으로 그 분을 맞아 들일 수 있을까?
잠시 앉으셔서 가벼운 차 한잔에 딱 그만큼의 일상을 나누는 정도라면 충분히 자신 있다. 완벽하진 않아도 나름 깨끗한 원룸이니까. 이 방이라면 예수님이 어디로 움직이실지 한눈에 파악이 될테니 원치 않는 곳을 급습 당하는 일은 없겠지. 그리곤 이내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다. 요즘 내 삶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도 제목은 무엇인지. 그리고 혹시 예수님도 알고 계셨냐고 슬쩍 여쭈어 볼테지.

  내심 예수님이 좀더 오래 머물러 주시길 약간은 기대하고 있다. 그분께 속 깊은 이야기들을 꺼내 놓을 수 있을 테니까. 힘들었지만 견뎌야 했던 지난 시간들이 내게 얼마나 버거웠는지, 그럼에도 그 시간들을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내겐 은혜라고 고백할 작정이다. 그래, 문제없다! 예수님이 찾아 오셔도.


  하지만 내 방 쇼파에 앉아 있는 이웃을 마주하거나 내 키보드를 쿵쾅거리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 나는 과연 괜찮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이웃으로 흘러가는 것은 내 예상을 넘어서는 일이다. 책을 읽다가 마음이 불편했던 지점도 바로 그 곳이었다. 묵을 곳이 없는 노숙자 가족이 집에 들어와 있을 때. 나는 마치 그들이 '내 집에' 들어온 것 마냥 짜증이 났다. 또 아무런 상의 없이 그들을 내 방으로 들어오게 하신 예수님에게도 마음이 불편해 졌다. “이제 그만 나가 주시겠어요?” 누구를 향한 말인지 모를 한마디가 입 밖으로 불쑥 튀어 나갈 것만 같다.


  만원 지하철에 서 있을 때,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평가받고 저울질 당한다고 느낄 때,  교통법규를 무시하고 달려오는 차들 앞에서, 나는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거부한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그분을 실망시킬까봐 두렵다. 그냥 내 방에서, 나와 예수님 단 둘만 만나면 좋으련만.




  지난 3년간, 그러니까 내 삶을 돌봐줄 사람 없이 혼자 살게 되었을 때부터 나의 신앙은 나와 예수님의 관계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마치 예수님은 나의 아픔과 상처를 만져주고 회복 시키시기 위해서만 이 땅에 오신 것 처럼 말이다. 그렇게 지내던 내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 혼자가 아니라 이웃을 데리고서.


  예수님은 나의 삶과 상처를 돌보시는 분 이시지만 우리의 관계가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예수님이 내 삶에 머무실 때 나의 삶엔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내게 상처를 주는 많은 이들을 용서해야 하며 나는 다시 관계 속으로 나를 던져야 한다. 두렵고 통제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 또다시 소진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하지만 그 속에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교제의 풍성함이 숨어있는 줄 이제는 안다.


  닫혀있던 문을 열었더니 그 문으로 예수님이 들어 오셨다. 그 분은 날 너무 사랑하신다. 그래서 혼자 오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 우리 모두 충만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이곳으로 불러 모으셨고, 우리는 그분을 우리 집 가장으로 모셨다. 예수님은 이 일에 매우 뛰어나신 분이므로.  p62"



김슬아(자취하는 인도공주)ㅣ 한문교육을 배웠고, 인문학을 가르친다. 따라가던 구름기둥이 머무는 곳에서 나름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 나라가 무슨 상관인가? [IVP BOOK NEWS 121호]

[서평]

그리스도와 법: 하나님의 정의는 국가의 법을 통해 어떻게 실현되는가
로버트 코크란 외 | 이일 옮김 | 304면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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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의 법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의 분석틀을 빌려 와서 각 교파/신앙고백적 관점들을 각각 종합주의자(로마 가톨릭), 변혁주의자(개혁파), 분리주의자(재침례파), 이원주의자(루터파)로 구분한다. 그런 다음 각 교파/신앙고백적 입장이 사회, 국가, 법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살핀다.



법을 바라보는 교파/신앙고백적 입장들


■ 종합주의자 로마가톨릭
자연과 은총, 이성과 신앙, 세속과 교회가 모순되지 않고 상호보완적이라 본다. 모든 피조물들은 본질적으로 선하며, 타락했음에도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 비롯된다. 이러한 낙관적인 인간론은 가톨릭 법사상에 있어 인간 존엄성과 인간 이성의 초월적인 능력, 인간의 자유로 연결된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의 근원적인 성품인 사회성의 발현으로서 사회와 국가가 성립한다. 이때 가톨릭교회가 강조하는 사회 속 인간은 개인주의나 집단주의와 구별되는 ‘인격주의’적 개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품들은 모두 인간 본성에서 직접적으로 나오는 권리와 의무 목록으로 연결되며, 가톨릭 사회 이론에 있어서 사회가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보는 견해를 낳는다. 사회와 국가를 구별하고 보충성과 사회화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국가의 존재 의의를 고려하는 가톨릭의 입장은 궁극적으로 국가를 자연법의 구속을 받는 기관으로 만든다.

1장 첫머리의 “법과 정의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관점”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계승하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어떻게 현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신앙에 기초해 인간과 사회, 법과 정의에 대해 생각하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의 차이와 특히 자연법에 대한 철학적 전개로 인해 형성된 낙관론적 인간론으로 인해 약화된 죄에 대한 인식이 신학적 성찰을 통해 죄에 주목하게 되었음을 잘 지적한다. 이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인식이 개인에서 구조와 사회의 문제로까지 확장됨으로써 국가에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접근하는 자연법사상의 경향을 수정했음을 언급한다. 이 논의를 이어받아 제라드 브래들리는 “자연법”이라는 글에서 자연법의 의미와 법사상, 특히 미국 법사상에서 자연법이 어떠한 의의와 역할을 지녔는지 보여 준다.


■ 변혁주의자 개혁파

 칼뱅으로 대변되는 개혁파는 죄로 인한 타락과 부패를 강조하지만, 변혁의 가능성 또한 강조하는 입장이다. 네덜란드 개혁파가 이러한 입장을 이어받았으며, 특히 신칼빈주의자라고 불리는 북미의 개혁파가 계승했다. 한국에 장로교회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학적으로 변혁주의적 입장이 다수라 볼 수도 있겠다. 낙관적 인간 이해에서 출발하든 비관적 인간 이해에서 출발하든, 협력과 변혁을 강조하는 로마가톨릭과 개혁파 모두 분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던지는 비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2장에서는 칼뱅주의의 신학적 인간 이해가 미국 제헌의회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끼쳤는지 철저하게 보여 준다. 미국의 법제도에 칼뱅주의가 미친 영향을 심도 있게 연구한 「권리와 자유의 역사」(존 위티 주니어, IVP)와 함께 읽으면 개혁파의 입장을 좀 더 역사적으로 살필 수 있다. 이후에 실린 데이비드 커딜의 글 “법학에서 신앙의 자리에 대한 한 칼뱅주의자의 관점”은 네덜란드 개혁파의 정치사상과 법 이해 역시 소개하고 있는데 인물의 사상 소개에 그치는 감이 있어 약간 아쉽다.


■ 분리주의자 재침례파와 침례교

 이 입장은 강제력을 지닌 국가의 법에 저항한다. “급진적 종교개혁과 용서의 법학”에서는 재침례파가 말하는 용서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법사상에 반영될 수 있음을 말하며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가지고 미드라시적 묘사를 통해 용서의 문제를 다룬다. 이를 통해 “(모든) 시민 공동체가 용서를 기반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개념은…혁명적”(p. 180)임을 밝힌다.
 소수자요 핍박받은 공동체인 침례교의 역사를 통해 침례교회가 자신의 정황 속에서 국가와 법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하는 분리주의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침례교 신학은 그 구원 개념에서부터 각 개인의 자유에 기초해 있으며, 이러한 원리는 신학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을 지닌 침례교회가 분파주의에서 교파주의화되었고, 다른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도덕적 다원주의에 맞서 싸우며 자신들의 고유한 입장이 약화되었음을 지적한다.
 “바벨론에서의 자유와 생명에 대해”에서 국가의 영역을 최소화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해 자신의 신앙을 증거해야 함을 역설한다. 다원화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신앙은 축출되고 마는데, 그렇다면 그것에 저항하지 말고 차라리 독자적으로 활동할 자유를 얻어 내자는 것이다. 기독교가 소수로 밀려나는 시점에 이 주장은 상당히 솔깃하게 들린다.


■ 이원주의자 루터파

마르틴 루터로 대변되는 이원주의는 교회와 국가, 그리스도인과 법의 관계를 긴장 관계로 본다. 왜냐하면 각기 다 른 통치영역을 지닌 별개의 국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열된 집?"에서는 루터파와 재침례파의 국가관을 비교해서 서술한 후 루터파의 관점이 개혁파와 로마가톨릭의 관점과는 어떻게 다른지 간략히 나와 있다. 그러면서 루터파가 국가가 지니는 칼의 권세를 인정한 것은 힘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라는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 우리가 거할 곳을 만드는 것”에서는 루터 당대와는 다른 미국 상황 가운데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솔직히 인정하며 논의를 전개한다. 기독교 국가시기를 지난 시점에 후기 기독교 국가시기에 대응하는 양 극단인 신정주의와 분리주의 사이에 서 있으면서 정치 영역의 독자성을 인정한 두 왕국 이론이 초기 이론 그대로 유지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이 ‘복음이거나 복음이 아닌 것’ 중 ‘하나의 선택’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서 자신이 자리할 공간을 법은 창조해 낸다”(p. 293)고 말한다.



균형, 시대 분별, 소명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얼까? 이 책의 편집자인 로버트 코크란은 서로의 차이를 분명히 깨달음으로써 오히려 균형과 시대 분별, 소명 의식을 가지고 각 전통을 화해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점을 꼽는다. 실제로 이 책을 읽는 동안 로마가톨릭 입장과 재침례파와 침례교의 입장을 다룬 글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각 교파의 신앙고백적 입장과 세부적인 인식들이 흐릿하여 도리어 공통기반과 차이점이 드러나지 않는 우리 현실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고백하고 선택한 입장을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이 세상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참, 종교개혁이 새로운 교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중세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설명을 제공해야 할 텐데, 이 책에서는 그러한 지점까지 다뤄지지는 않았다. 이 주제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이 부분이 조금 아쉬움으로 남는다.



김병규 | 법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열린교회 신학연구실과 여러 곳에서 출판 등 책과 관련된 일을 했다. 지금은 무등개혁교회의 설교자로 섬기면서 목회와 신학의 현장인 교회와 세상의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다.

과학의 시대, 영혼을 재발견하다 [IVP BOOK NEWS 121호]

[서평]

마음 뇌 영혼 신

심리학과 신앙에 관한 허심탄회한 대화
말콤 지브스 | 홍종락 옮김 | 304면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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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아버지는 뇌질환을 앓으셨다. 뇌출혈로 돌아가시기 전, 나는 아버지의 뇌혈관을 막고 있는 혈전이 그동안 아버지의 모든 영적인 실천을 무참하게 뭉겨버리는 듯한 장면을 목격했다. 60년 동안 경건한 예배의 삶을 이어오시던 아버지는 멍하니 설교를 듣다가 웃음을 터뜨리시곤 했다. 그것도 자주.

   당시 나는 과학적 방법론에 다소 익숙한 신학도로서 인간의 뇌에서 발생한 물리적 혹은 화학적 변화가 주는 영향력이 한 인간의 오랜 신앙 여정을 여지없이 뒤흔들 수 있다는 반격에 사뭇 긴장했다. 신앙의 유지는 뇌 안의 뉴런의 건강한 기능이 전제돼야 한다는 엄연한 가설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나는 인간의 종교심의 구성요소를 단순히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논증하는 일을 넘어서, 훨씬 광대하고 연계성 있는 학제간 논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 안의 소리를 연결하다

   뇌과학과 인지심리학, 종교 분야의 접점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말콤 지브스 교수의 「마음 뇌 영혼 신」은 인간에 대한 기초적인 질문, 곧 '나는 누구인가'(who I am)라는 철학적·종교적 질문과 '나는 무엇인가'(what I am)라는 과학적 질문의 합류 가능성을 묻는 모두에게 친절한 필체로 최고의 가이드를 제공한다. 이 책에는 우리 내면에서 쉬지 않고 일어날 만한 흔한 질문들을 끈질기게 묻는 호기심 많은 대학생 벤이 등장하고, 벤의 질문에 노교수 말콤은 쉽고 명료하게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인 노력들을 소개한다.

말콤 지브스는 게이지 논쟁*이후 전혀 관련 없어 보이던 새로운 연구 분야를 엮어 내는 데 혁혁한 공을 거둔 학자로 인정받는다. 발달심리학과 치료 분야, 인지심리학 분야, 뇌 영상 촬영 기술 등은 이제 서로 밀접하게 마음과 뇌에 관한 연구 관심을 소통시키며 발전해 왔다. 특히 영혼에 대한 종교적인 연구도 이러한 소통 구조 안에 위치시키려고 애써 왔다. 그래서 내담자들이나 교인들의 영혼의 상처를 감싸 안고, 그 영혼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중간다리가 되어 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는 기독교 상담가들이나 목회자들은 그의 연구를 비껴갈 수 없다.

*1848년, 25세의 철도회사 노동자 피니어스 게이지(Phineas Gage)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전전두엽(prefrontal lobe)에 손상을 입은 후 성격이 포악해진 사건. 이를 통해 교육이나 훈련 혹은 종교적 실천을 통해 고양된다고 여겨지던 도덕성이나 심성이 단순히 인간 뇌의 부분적인 기능으로 환원되었다.



이중 양상 일원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관계처럼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신비로운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의식적 경험을 파악하는 동시에, 물리적 기초가 손상되면 그것이 바뀔 수 있음을 이해하고, 두 측면을 모두 제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합의가 폭넓게 이루어지도록 친절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마음이나 영혼을 돌보는 이들과 생물학적 뇌 구조를 분석하고 처치하는 의학자들이 어떻게 서로의 일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 정신과 신체는 외나무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이한 두 지역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무리하게 두 영역의 통합을 위해 정신과 신체 사이의 다리를 무너뜨리려 하지는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 정신과 신체 사이에는 중요한 이중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이중성 때문에 두 종류의 실체가 있다고 말하거나 실체를 단순하게 이분적으로 나누어 이해하려는 이원론을 믿을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이중 양상 일원론자”라고 이름 붙였다.

   그렇다면 종교인들에게 영성이나 신앙은 하나님과 개인의 정신적인 관계성의 문제인 동시에, 성육화된(embodied) 관계성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뇌질환을 앓던 나의 아버지의 신앙이나 영성이 갑자기 없어지거나 부실해진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우리의 영성은 하나님을 향한 정신적인 관계성일 뿐 아니라, 뇌와 신체와도 밀접하게 연결된 관계성의 문제였다.

   우리는 매일 컴퓨터를 사용하면서도 하드웨어의 기반 없이 소프트웨어에만 익숙하게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드웨어에 문제가 생기면 워드프로세서도 엑셀도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좀 더 중요한 신체의 기능을 도외시하거나, 아니면 신체의 기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드는 환원주의의 무모함을 발휘하기도 한다. 소프트웨어의 발달은 하드웨어에 기초한 것인데, 모든 소프트웨어의 기술적 발전이 하드웨어의 기초 기능과 동일한 것이라고 환원해 버리면 지브스가 주장하는 ‘이중 양상 이원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진화심리학에 대한 생각에 균형감각을 주는 책

  나는 「마음 뇌 영혼 신」을 진화심리학에 매료된 지성인들에게 권하고 싶다. 진화심리학은 여러 심리학 분야 중 하나로 최근 첨예한 관심을 받는 연구영역이다. 그는 진화심리학의 역할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심리학이 진화심리학으로 통폐합되고 있다는 식의 과도한 주장은 차분히 생각해 볼 것을 권고한다.

    탁월한 수학자이자 사상가이며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파스칼은 “사람에게 그의 위대함을 보여 주지 않은 채 짐승을 많이 닮았다는 점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위험하다. 저속함을 드러내지 않고 위대함만 또렷이 보게 하는 것도 위험하다. 위대함과 저속함을 둘 다 모르는 상태로 사람을 내버려두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고 말했다. 지브스는 진화심리학이야말로 파스칼이 언급한 무지를 줄이는 데 분명 도움을 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브스 교수의 균형감 있는 학문성은 진화심리학에 대한 평가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 겹치는 기능에 주목하는 것도 합당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브스 교수는 특유의 혜안으로 약 10-20년 후 진화심리학 연구의 몇몇 분야는 동물과 인간의 인지적 성취와 행동 사이의 공통점과 유사성을 꼼꼼히 기록하는 데서 벗어나 인간의 인지와 행동의 독특성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새로운 이해의 장을 여는 매력적인 대화들

   「마음 뇌 영혼 신」은 정신의 영역과 영혼의 세계를 물질과 신체 영역으로 환원시키지 않으면서 양자가 하나의 실체를 동시에 반영하는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중 양상 일원론'의 관점으로 인도한다. 영혼과 신의 문제도 신체와 분리된 구별된 세계로 이해하는 것을 경계하고,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신체를 통한 성육신 사건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신학적 진리는 신경생리학과 인지심리학의 최근 연구와도 부합되는 통합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나면, 현대 가장 첨예한 관심을 받는 뇌과학의 영역도 하나님과 우주를 관계적으로 인식하는 영혼, 종교의 영역과 결코 반대편에 있지않음을 동감하게 될 것이다. 벤의 질문 중 하나라도 떠올려 본 적이 있다면, 끝까지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대화이다.




권수영 |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목회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연세대 상담코칭지원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프로이트와 종교」(살림),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 종교와 심리학의 만남」(책세상) 등을 썼다.


다른 공기를 호흡하다 [IVP BOOK NEWS 121호]

[역자 후기]

기억의 종말
The End of Memory
미로슬라브 볼프 | 홍종락 옮김 | 12월 출간 예정



「기억의 종말」은 기억을 다룬다. 그중에서도 악행을 당한 기억을 다룬다. 
이렇게 빛나는 통찰과 지혜가 가득 담긴 책을 몇 마디로 소개하기는 무리지만, 
아쉬운 대로 몇 가지만 말해보려 한다. 


이 책은 두 가지 도발적인 주장을 한다. 첫째, 악행을 기억하는 것은 피해자를 위한 일일 뿐 아니라 가해자를 위한 일이기도 해야 한다. 가해자까지 고려하여 악행을 기억해야 한다니. 이렇게만 들으면 참 배부른 소리, 현실을 모르는 소리처럼 들린다.

영화 <밀양>의 한 장면

  일본이 식민지 지배 당시 어떤 악행들을 저질렀던가. 거기까지 갈 것도 없다. 교회 중고등부 교사를 하다 보니 아이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직간접적으로 듣게 된다. 그런데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이지 화가 난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슈퍼히어로처럼 날아가 ‘악당들’을 응징이라도 하면 좋겠다. 나도 이런 마음인데 아이 본인이나 부모의 심정은 오죽할까. 여기서 가해자의 사정을 고려하라는 말이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인다.

  물론 저자가 이 정도 문제의식도 없을 리는 없다. 저자는 악행의 기억이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와 관계의 회복이다. 그것이 피해자의 일방적인 용서와 이해만으로 가능할 리가 없다.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필요하다면 배상을 하고 피해자의 용서를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까지 바라보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고, 양측이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노력한다 해도 대체로 그 성과는 불완전할 것이다. 저자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저자에겐 믿는 구석이 있다. 정의가 회복되고 그런 사랑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이 불러오실 내세에 대한 소망이다. 저자의 두 번째 도발적인 주장은 내세에는 ‘기억의 종말’이 있을 거라는 내용이다. 악행의 기억이 끝나는 때, 악행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을 세상이 온다. 이 말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들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기억하라!'는 촉구가 아니던가.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너무 쉽게 외면해 버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닌가.

위안부 수요 집회 모습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적당히 잊고, 적당히 끝내자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도 ‘기억하라’는 촉구의 정당성과 당위를 충분히 이해한다. 현세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억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누누이 지적한다. 그러나 내세는 하나님이 온전한 정의를 회복하실 세상이니 그 부분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곳에서는 악행의 기억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고’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이 불러오실 이런 새로운 세상, 내세에 대한 소망을, 악행으로 얼룩진 이곳에서 지금 추구해야 할 관계의 청사진으로 삼고자 한다. (그런 관념적이고 허공에 뜬 이야기가 현실과 무슨 상관이람! 이런 생각이 든다면 평등사회의 꿈을 좇아 70년 넘게 세상의 절반을 움직였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위력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을 보라. 가야 할 바, 추구해야 할 그림이 없는 세상이 어디로 향하는가.)



저자는 이 두 주장을 펼치기에 앞서, 책의 전반부에서 바르게 기억하기 위한 단계들을 하나씩 밝힌다. 우선, 기억이 보호의 방패가 되지 못하고 공격의 칼이 될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계하고(악행의 기억이 복수의 악순환만 낳을 수도 있다), 기억하되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원칙들을 새긴다. 진실하게 기억하고, 치유에 보탬이 되게 기억하라. 그리고 출애굽과 그리스도 수난의 기억을 패러다임으로 삼아서 기억하라. 출애굽과 그리스도의 수난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할 결론’이자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한 나는, 이 둘을 출발점으로 삼아 세상을 바라보고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각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아직 신앙의 세계에 제대로 진입하지도 못한 것 아닌가, 하는 반성과 함께 잠깐이나마 뭔가 다른 공기를 호흡한 것 같았다.


볼프에게 신학은 곧 신앙고백이지 싶다.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사색하고 논문을 쓰고 발표하는 일인 동시에 본인이 살아가야 할 현실이요 붙들어야 할 소망임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특하고, 잘 읽히면서도 심오하며, 거시적이면서도 개인적이고, 종말론적이면서도 현재적이며, 종교적이면서 현실적이다. 신학서적이 진정한 경건서적이라는 말, 이 책을 읽고 비로소 공감이 갔다.


"악이 온전히 이기려면 한번이 아니라 두 번의 승리가 필요하다. 악행이 일어날 때 첫 번째승리가 이루어지고, 악을 앙갚음할 때 두 번째 승리가 이루어진다. 첫 번째 승리 후, 두 번째 승리로 새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면 악은 죽고 만다. 내 경우, 악의 첫 번째 승리에 대해서는 손쓸 수 없었지만 두 번째 승리를 막을 수는 있었다. G대위가 나를 그와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악을 악으로 갚는 대신,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주목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리라 마음먹었다(롬 12:21). 결국, 나는 불경건한 자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아닌가. 그래서 다시 한 번, 이번에는 G대위를 상대로 나는 원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 비틀대며 걷기 시작했다. " (1장 "심문의 기억" 중에서)




홍종락 |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으며, 번역하며 배운 내용을 자기 글로 풀어낼 궁리를 하고 산다. 더 많은 그의 글을 읽고 싶다면 블로그 "번역가 홍종락의 서재를 소개합니다"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가을에는 책을 읽게 하소서 [IVP BOOK NEWS 121호]

준비된, 준비 중인 도서를 소개합니다.

신약의 모든 기도: 예수님과 사도들을 따라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다
New Testament Prayer for Everyone
톰 라이트 ㅣ 백지윤 옮김 | 8월 28일 출간


신약의 기도 한 편 한 편은 꺼져 있는/가는 우리의 희미한 기도를 다시 타오르게 하는 불씨가 되어 줄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와 바울과 초기 기독교의 기도 32편을 톰 라이트가 강해식으로 풀어낸 기도의 영성, 곧 기도의 실재.
매일 한 편씩 읽고 자신의 기도를 새롭게하기에 딱 좋다. 새벽 기도회 때 활용해도 좋겠다.
이미 풍성하게 넘치는 치열한 기도의 모범을 얼마나 잊고 살았는지 반성하게 해주는 책.










문서선교사 웨슬리 웬트워스: 웨슬리와 친구들이 들려주는 소명, 학문, 그리고 교육 이야기
손봉호 외ㅣ9월 19일 출간


자신의 이름으로 된 땅 한 평도 없었지만 문서 운동과 기독 지성 운동, 기독교 학교 교육 운동에 묵묵히 씨앗을 뿌린 한 사람, 그리고 그의 일생을 통해 조용한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 이야기.
50년 전 한국에 들어와 지금까지도 열정적으로 사역하고 있는 웨슬리 웬트워스 선교사의 개인적 회고와, 그를 만나고 교제해 온 15명의 학자들이 들려주는 웨슬리 이야기를 담아 냈다.













기억의 종말 (가제)
The End of Memory
미로슬라브 볼프 | 홍종락 옮김 | 10월 출간 예정


증오와 배제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상처 입은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가 잊어야 하는가?
화해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증오의 기억은 망각의 강에 흘려보내야 한다는 급진적 의견을 제시한다.
잘못된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 정의를 위한 싸움임을 동의하면서도, 볼프는 우리가 기억하는 잘못된 방식들이 오히려 악을 허락하는 일일 수 있다고 말한다.
볼프 자신이 경험한 증오와 상처의 기억에 대한 성경적 성찰을 통해,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와 우리 모두의 치유의 중심임을 주장한다.
사려 깊고 예리한 추론을 통해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책이다.








교회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 가나안 성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재영 | 10월 출간 예정


한국교회의 가나안 현상에 대한 최초의 종교사회학적 연구 보고서! 불현듯 도래한 1백만 가나안 성도 시대,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가나안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만나 상세한 설문 조사와 심층 면접을 진행해 이를 분석하고 제시한다.
또한 이와 관련된 해외의 종교사회학 연구를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교회의 바른 대응을 모색한다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알라: 이슬람과 기독교의 하나님 (가제)
Allah: A Christian Response
미로슬라브 볼프 | 백지윤 옮김 | 11월 출간 예정


기독교와 이슬람은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믿는 종교로서 그 숫자와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이슬람에 대한 전 세계의 경계의 시선과 '이슬람 포비아'(이슬람혐오증)는 점증하고 있다.
볼프는 평화를 위협하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믿는 신은 정말 다른가?" 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나아가 볼프는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종교의 다원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진리를 따르는 두 종교가 사랑과 화해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공존의 길을 모색할 때 우리는 평화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Living in Christ's Presence
달라스 윌라드 | 윤종석 옮김 | 12월 출간 예정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제자도나 그리스도를 닮는 삶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르기보다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나, 나 좋을 대로 사는 것에 집중하며 살고 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의 가르침을 살아내는 데는 오히려 무기력하다. 이제 우리는 변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존엄함을 이해하고 영적인 삶을 통해 우리의 변화가 축복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깨닫게 해야 한다.
이 책은 달라스 윌라드의 마지막 강연인 “오늘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컨퍼런스의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각 장의 내용은 달라스 윌라드의 공적 사역을 총정리하는 결론에 해당한다.



「그리스도와 지성」의 독자들에게 [IVP BOOK NEWS 121호]

[저자 서문]

그리스도와 지성

마크 놀 | 박규태 옮김 | 252면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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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지성」은 IVP 직영서점 산책에서 가장 먼저 만나보실 수 있고, 
YES24교보문고알라딘인터파크반디앤루니스 등 주요 온라인 서점과 
갓피플몰라이프북 등의 기독교 온라인 서점 및 지역 서점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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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한국어판이 출간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지난 2004년 10월, 이 책의 주제를 발표하도록 기회를 주셨던 한국기독교학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릴 기회를 얻은 것도 기쁜 일입니다. 당시 학회의 고무적인 반응들로 저는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결국 이 책으로 결실 맺은 내용들을 조정해 나가는 데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적 헌신과 끈기 있는 열정은 널리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서구의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한국 교회와 해외 선교에서 그 열정과 헌신으로 이룬 많은 일을 보며 벅찹니다. 그런 열정과 헌신이 신학적 이해에 기여한 바는 부분적으로만 알 뿐이지만, 신학과 성경학과 일반 학문 영역에서 얼마나 좋은 결실들을 이루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과 한국 교회 안에 이미 꽃피고 있는 기독 지성이 열매로 무르익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와 지성」의 메시지는 간단히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여긴다면, 학문 활동과 연관된 모든 것을 비롯한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그분을 인도자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죠. 그분의 인도하심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다양한 형태의 현대 학문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도록 길을 열어 줍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성경의 계시와 그분의 사역을 요약한 위대한 기독교 신경들을 깊이 숙고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학문이라는 도전에 다가갈 때, 신경들의 주요 가르침이 어떻게 안정된 기초가 되는지 설명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학문 연구에서 그리스도인을 격려하고 이끌어 줍니다.

  이를 토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고전적 교리들이 역사학, 과학, 성경 연구 분야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는지 사례들을 보여 줍니다. 그러한 실제 사례들을 제시하는 이유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지적 과업의 추구를 위해 택할 유일한 방식을 규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학문적 과업을 수행할 때 의식적으로 그들 신앙 전통의 가장 심오한 보화들을 끌어오라고 설득하려는 것입니다.

  이 책의 말미에는 북미권 복음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지적 노력의 현 주소를 평가하는 후기를 실었습니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의 분석에 이후 상황을 반영하여 갱신한 것입 니다. 한국의 독자들이 후기에 담긴 북미의 세세한 상황에만 너무 관심을 쏟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보다는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이 지음 받은” 분이자(히 1:2), “만물이 그분 안에 존속”하게 하시는 분(골 1:17)을 따를 때 한국이라는 지역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지적 도전을 기꺼이 감당할 용기를 이 책을 통해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마크 놀 | 미국 역사학계를 이끄는 대표적 학자이자 존경받는 복음주의 지성이다. 1946년에 태어나 휘튼 칼리지(B.A.)와 아이오와 대학교(M.A.)에서 영문학을, 트리니티 신학교(M.A.)와 밴더빌트 대학교(Ph.D.)에서 교회사를 전공했다. 27년간 휘튼 칼리지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며 강연과 집필을 통해 미국 개신교 역사와 복음주의의 반지성주의적 태도를 성찰해 왔으며, 지금은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미국 역사학의 거장 조지 마스덴의 뒤를 이어 역사와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2005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복음주의자 2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았으며, 종교와 일반 역사를 아우르는 방대하고 탁월한 학문성을 인정받아 2006년 국가 인문학 훈장(National Humanities Medal)을 받았다.

교회가 속히 교회가 되어야 하리라 [IVP BOOK NEWS 121호]


너무도 다른 교회

주일에 사랑하는 제자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장년 교인 수가 2천 명이 넘어가면서, 그 교회는 분립 등 교회 몸집을 줄이는 여러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좋은 교회로 소문이 나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지만 타 교회 교인들은 절대 받지 않는다. 교회의 대형화를 막고 지역 교회와의 좋은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지역의 어떤 대형교회는 다른 교회 교인들까지 뺏어가려고 한다. 제자 목사의 아파트에까지 그 교회에서 전도를 왔다고 한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자기 교회를 소개하고 싶다며 물러가지 않더라는 것이다. 같은 지역에 있는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자기들 교회로 끄는 호객행위를 한다. 그 교회는 탐욕스럽게 몸집을 불린다고 소문이 나 있다. 그런 교회 목사는 자신이 한국 교회의 리더라도 되는 양 설치고 돌아다닌다. 교회나 목사나 달라도 너무 다르다.



교회의 빈익빈 부익부

창립 10주년을 맞은 어떤 교회는 매년 교인이 천 명씩 늘었다고 한다. 어떤 대형교회는 매년 수천 명 씩 몰려온다고 한다. 그런 소식을 접하며 기쁘기보다 마음이 좀 씁쓸한 것은 왜일까? 교인수가 적은 교회를 섬기는 이로서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껴서일까. 솔직히 그런 것도 없지 않을게다.

  나는 10년 동안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 찾는 자 없이 싸늘하게 외면당하는 작은 교회의 설움을 뼈 속 깊이 체감하였다. 가뭄에 콩 나듯 새 교인 한 명이라도 오면 얼마나 기쁜지, 그러나 교인 한 명이라도 교회를 떠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오랫동안 수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작은 교회를 섬겨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80% 이상의 한국교회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다. 교인 한 명으로 인해 희비가 엇갈리는 작은 교회의 옹색함과 일 년에 천 명씩 몰려드는 교회의 도도함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빈익빈 부익부보다 더 심한 양극화를 보는 듯하다. 그런 교회와 목사에게 천 명 속에 한 사람의 존재감이 제대로 느껴질까.

  이렇게 특정 교회로 몰리는 현상은 그만큼 갈 만한 교회가 없다는 방증이라 한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참신하고 의식 있고 설교 잘하는 것으로 알려진 스타 목사를 중심으로 몰려들어 대형 교회를 이루는 것은 결코 건강한 현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다. 몇 만 명이 모여 이루어진 집단 속에서 어떻게 친밀한 성도의 교제와 섬김을 통해 끈끈한 하나님의 가족애를 체험할 수 있을까.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여러 가지 큰일을 할 수는 있어도 상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교회의 본질은 점점 구현하기 힘들어진다.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의 공동체, 성령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이런 교회관을 가지고 목회하는 이들, 비록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스타 목사들 못지않게 순수하고 참신하며 실력 있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대형교회에서의 럭셔리한 교회생활을 포기하고 작은 교회의 열악하고 구질구질한 여건 속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라도 쓰러져가는 한국교회에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수고와 고난에 동참할 의향만 있다면 말이다.



가나안 교인들의 귀환

기존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교인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적으로 교회와 유리된 신자의 삶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의 연합을 뜻한다. 팔과 다리가 몸통에 붙어 있지 않고는 머리와 연결될 수 없듯이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으로 접합되어 있지 않으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될 수 없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음을 뜻한다. 동시에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의 전인 교회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의 가르침에서 교회와 분리된 신자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초대교회에서부터 개혁교회까지 계속 이어져 온 전통적인 신앙관이다.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교부 어거스틴은 태아가 모태를 떠나 생존할 수 없듯이 신자는 교회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개혁교회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칼뱅도 신자는 교회라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고 그 품안에서 젖을 빨며 양육된다고 했다.그러므로 교회를 안 나가고도 신자로 산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신앙이다.

  그렇다고 가나안 교인들만 비난할 수는 없다. 과연 현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교인들을 양육하는 영적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형식과 외식으로 화석화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약동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그 생명력이 소멸된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가나안 교인들이 자신들 안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생명이나마 부지하려고 영적으로 질식할 것 같은 교회를 탈출하는 것은 아닌지 기존 교회와 교인들(목사를 우선적으로 포함해서)의 심각한 자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온유하신 성령님을 너무도 오래 거스르고 근심케 하여 성령님이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스럽다. 아마 예수님과 성령님도 가나안 교인들과 함께 기존 교회를 떠나실 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나안 교인들은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타락한 교회를 떠나 참된 교회를 찾고 있는 일종의 순례자들인지도 모른다. 비록 그들 모두가 다 그렇지 아닐지라도 말이다. 성령께서 부디 그들을 인도하사 교회로 귀환시킬 날을 고대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속히 교회 되어야 하리라.


박영돈 현재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의학 교수로 섬기고 있으며, 한국교회 성령 운동의 문제점을 분석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과 한국교회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제시한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이상 IVP)의 저자다.